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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정치신문

왜 저주의 정치만 있고, 희생의 정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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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주의 정치만 있고, 희생의 정치는 없는가

이관순 기자 입력 2022/04/17 07:34 수정 2022.04.17 07:36

금오지의 봄
사진=경북정신문

[시사칼럼= 이관순 발행인]  어린 아들을 둔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그 남편은 삼년상이 끝난 후 두 명의 아들을 둔 여자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첫 번째 아내가 낳은 아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잘 보살피겠다는 여인의 약속은 오간 데가 없었습니다.

끼니를 거르게 하는가하면 한 겨울이 되어도 자신이 낳은 아들에겐 따스한 옷을 사 입히지만, 다른 여인이 낳은 아들에겐 가을 옷으로 겨울을 낳게 할 만큼 학대가 심했습니다.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남편은 두 명의 이붓아들과 함께 재혼한 여인을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밤늦게 아버지를 찾은 첫 번째 아내의 아들이 눈물을 글썽이면 아버지에게 호소를 합니다.

“그 여인이 저를 내쫓는다면 고생하는 것은 저 혼자로 그치지만, 만약 아버님이 이 한겨울에 그 여인을 쫓아낸다면 아버지는 세명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아버님, 저는 얼마든지 참을 수가 있으니, 그 여인을 내쫓지는 말아주십시오.”

문틈으로 들려오는 첫 번째 아내의 아들 얘기를 옅들은 여인은 그 이후로 그 배 밖의 아들에게 자신이 데리고 온 두 아들보다 더 지극정성을 쏟았다고 합니다. 어느 동화나라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5년 단위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나라 정치는 피의 보복이었습니다. 공정과 진실, 정의를 명분으로 내걸지만 훗날 돌아보면 그 자리에는 저주와 증오만이 있을 뿐 진실과 정의, 공정는 오간 데가 없었습니다.

 

더 큰 부를 얻고 권세를 누리기 위해 권력의 날을 휘둘렀다는 얘기입니다.
갈수록 이 나라의 정치에 ‘희생의 가치관’이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남을 위한 정치보다 자신의 욕망에 집착한 정치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십여 일 후에는 정권이 바뀝니다. 진보에서 진보로의 정권이 이양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에서 보수로의 정치가 이양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보복과 저주의 정치가 자리를 틀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전 정권이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권력의 색깔이 진보이든, 보수이든지 간에 지향하는 권력의 목표는 국민의 행복이어야 하고, 국운융성이어야 합니다.

 

 ‘당신이 나를 보복 했으니, 보복을 당했던 것보다 두배 이상 보복하고야 말겠다는 저주의 정치는 결국 나라와 백성을 불행하게 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희생의 정치‘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 한겨울에 저를 내쫒으면 저 혼자 고통을 겪겠지만, 저 여인을 내쫓으면 세명이 고통을 겪게된다”면서 아버지에게 자신을 학대한 여성을 품어 안아달라던 그 아들, 동화 이야기에 나오는 학대받던 그 아들의 착한 마음씀이 불현 듯 떠오른 4월의 봄날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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