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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정치신문/ 서울=손정우 기자] 최근 구미 정치권과 지역 사회가 정부의 호남권 반도체 투자 발표를 두고 "구미에도 반도체 공장(팹)을 내놓으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수도권 집중화에 맞서 지역 생존권을 지키겠다는 절박함은 이해하지만, 이 구도로는 승산이 낮다.
호남이냐 영남이냐는 이미 정치적 균형 발전이라는 명분 싸움으로 번져버렸고, 이 틀 안에서 목소리를 높일수록 오히려 '지역 이기주의' 프레임에 갇히기 쉽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싸움의 무대 자체를 바꾸는 전략이다.
산업구조도 냉정하게 봐야 한다. 지금 전 세계는 미국, 중국, 일본, 한국 할 것 없이 앞다퉈 반도체 팹을 짓고 있고, 각국 정부의 보조금 경쟁 속에 생산능력은 매년 커지고 있다. 특정 시점에 공급이 몰리며 경기 사이클에 따라 팹 가동률이 출렁이는 것은 이 산업의 오랜 특징이다.
반도체는 본질적으로 '어떤 공정을 먼저 개발했는가'라는 기술 경쟁이 1순위이고, '얼마나 많이 짓는가'는 그다음 문제다. 최선단 기술을 가진 곳은 대체 불가능하지만, 범용 생산 라인은 언제든 다른 도시, 다른 나라의 새 팹으로 대체될 수 있다.
구미가 '공장 하나 유치'에 정치력을 쏟아붓는 것은, 대체되기 쉬운 싸움에 도시의 명운을 거는 것과 같다.
로봇에 들어가는 반도체와 소재‧부품을 잡아라
지금처럼 '메모리 팹 유치'라는 프레임에만 매달리다가는, 반도체도 얻지 못하고 삼성이 구미에 약속한 로봇 클러스터의 주도권마저 다른 지역에 내줄 수 있다. 정치권이 명분 없는 싸움에 힘을 쏟는 사이, 실제 투자의 방향과 후속 공급망 배치는 정부와 기업의 실무 협의 테이블에서 조용히 결정된다.
생각을 바꾸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로봇이 곧 반도체 수요처이기 때문이다. 삼성이 구미에만 19조 원(영남권 전체 60조 원)을 투입해 휴머노이드 로봇 양산 체계와 AI 데이터센터를 짓겠다고 밝힌 것이 그 지렛대다. 휴머노이드 로봇 한 대에는 AI 연산 칩, 모터 제어 칩, 고정밀 센서 반도체가 다수 탑재된다. 로봇 산업 자체가 거대한 반도체 수요처인 셈이다.
여기에 구미만의 무기가 있다. 구미는 이미 2023년 비수도권 유일의 '반도체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로 지정돼, 소재·부품 중심의 반도체 후방 산업 거점 역할을 맡고 있다. 정부의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 구상에서 광주는 첨단 패키징, 부산은 전력반도체, 구미는 소재·부품을 담당하도록 역할이 나뉘었다.
로봇 산업의 경쟁력은 완성품이 아니라 공급망에서 나온다. AI 반도체와 센서, 제어칩, 정밀모터, 액추에이터, PCB, 커넥터 등 수많은 핵심 부품이 하나의 로봇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구미는 이미 반도체 소부장 특화단지와 전자·전기 부품 산업 기반을 갖추고 있어 이러한 공급망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삼성의 휴머노이드 양산 체계까지 더해진다면, 구미는 반도체와 로봇이 함께 성장하는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산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미 정치권이 요구해야 할 것은 명확해진다. "호남이 아닌 우리에게 메모리 팹을 달라"가 아니라, "삼성이 구미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을 양산하니, 그 로봇에 들어갈 소재·부품 공급망은 물론, 로봇용 반도체를 실제로 생산할 반도체 공장까지 구미에 함께 유치해달라"는 요구다.
이미 소재·부품 기반을 갖춘 곳에 그 위에서 작동할 반도체 공장을 얹는 것은, 아무 기반 없는 지역이 팹 하나를 통째로 요구하는 것과는 명분의 무게가 다르다. 다른 지역의 몫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이미 공인한 구미의 정체성과 삼성의 로봇 투자를 잇는 논리적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부터가 진짜 정치력 싸움이다. 목소리만 높이는 정치가 아니라, 이미 확보한 소부장 기반을 근거로 로봇용 반도체 공장까지 끌어오는 정교하고 집요한 협상력이 필요하다.
구미 공단 전체를 살리는 큰 그림을 봐야한다
반도체 팹은 소수의 대형 장비업체가 공급을 좌우하는 자본 집약 산업이라, 대규모 고용과 세수는 만들어도 그 혜택이 구미공단 곳곳의 중소 부품업체 수천 곳까지 골고루 퍼지기는 어렵다. 파이는 크지만 나눠 먹을 손은 적은 구조다.
로봇은 다르다. 휴머노이드 로봇 한 대에는 감속기, 액추에이터, 정밀모터, 각종 센서, 배선·커넥터, 사출·방열 부품, 소형 기판까지 수만 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자동차 산업처럼 완성품 하나를 두고 대·중·소기업이 함께 얽혀 돌아가는 조립형 생태계다. 구미공단은 이미 수십 년간 전자·전기 부품 중소기업이 밀집해온 지역이라, 이 구조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반도체 팹이 "삼성이 지어주는 큰 공장 하나"에 기대는 길이라면, 로봇은 구미공단 안의 수많은 중소기업이 공급망 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길이다. 대기업 하나의 결정에 도시 전체가 좌우되는 구조에서 벗어나, 공단 전체가 함께 살아나는 산업으로 체질을 바꿀 기회이기도 하다.
짜인 판에 들어갈 것인가, 새 판을 짤 것인가
국내 최대 반도체 전시회인 반도체 대전(SEDEX)은 서울에 고정돼 있고, 구미는 매년 부스를 내어 투자 유치를 홍보하는 참가자 입장에 머물러 있다. 로봇 쪽도 국내 최대 전시회 로보월드는 경기 고양에, 2026년 국제대회 로보컵은 인천 송도에 이미 자리를 잡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구미에는 고양이나 인천에는 없는 카드가 있다. 그 도시들은 '전시장을 가진 도시'일 뿐, 로봇을 실제로 만드는 도시가 아니다. 구미는 삼성이 휴머노이드를 실제로 양산하는 생산 핵심 거점이 된다.
전시·박람회 유치 경쟁이 아니라, "로봇이 실제로 만들어지는 현장을 보고 싶다면 구미로 오라"는 실증·생산 중심의 국제 콘퍼런스나 산업 서밋을 새로 만들어낼 명분은 구미만이 가질 수 있다.
반도체가 이미 짜인 판에서 자리를 구걸해야 하는 처지라면, 로봇은 구미가 판을 새로 짤 수 있는 영역이다.
인재가 스스로 내려오는 도시
로봇 산업은 지방 도시의 오랜 숙제인 '젊은 인재 유출'을 막을 치유책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젊은 엔지니어와 연구원들은 전통적인 제조 공장만을 찾지 않는다.
AI와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첨단 테크 도시로 움직인다. 구미가 '대한민국 유일의 글로벌 로봇 수도'라는 타이틀을 선점해야 수도권의 고급 인력들이 제 발로 내려오는 선순환이 시작될 수 있다.
지역 정치권은 삼성이 열어준 19조 원의 기회 위에서, 대기업 하나가 아니라 공단 전체가 함께 살아나는 생태계로 구미의 체질을 바꾸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 결단의 중심에는, 이미 구미가 가진 반도체 소부장 특화단지의 정체성을 로봇 산업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논리가 있어야 한다. 시대는 변하는데 정치권의 시선만 과거에 머물러 있어서는 구미의 내일을 열 수 없다.
손정우 기자 gbpolitics
사진=경북정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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