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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정치신문

코로나 19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감동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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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감동의 정치’다

김경홍 기자 입력 2020/08/23 17:00 수정 2020.08.23 17:00

 

↑↑ ] 바다는 어떠한 물도 사양하지 않는다./ 사진 = 블로그 바르는 성장호르몬, 먹는 줄기세포 캡처


[데스크 칼럼 = 발행인 김경홍] 천주교의 기도문에는 ‘내 탓이오’라는 구절이 있다. 자신이 지은 다툼이 모두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양심의 고백이다. 성경에도 유사한 가르침이 있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만 본다”는 구절이다.
논어나 맹자 역시 매한가지로 “남의 잘못에는 밝지만, 자신의 잘못에는 어둡다”고 하거나 “잘못이 있을 때는 먼저 그 원인을 자신으로부터 찾으라”고 후학들에게 가르쳤다.
천주교나 기독교, 유교까지도 공동체의 삶 속에서 ‘내 탓이오’라는 종교적 가치관을 실현하도록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코로나 19가 전국적인 대유행이라는 극한 상황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되살아난 코로나 19 불씨가 들불처럼 번지면서 생명과 안전, 재산을 위협하고 있는 위급한 상황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불길을 잡아야 할 정치권은 ‘너희 탓’ 공방이다.
치솟는 불길이 집을 삼키고 있고, 갇혀있는 식솔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데, 그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부부가 ‘너희 탓’ 공방을 하며 멱살을 부여잡고 있으니, 소중한 재산과 갇혀있는 소중한 생명이 무사할 리 없다.

국민이 정치에 감동할 때 국민은 행복하고, 국가는 흥한다. 국민이 정치를 혐오하면 국민과 국가의 현재와 미래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옛날 어느 마을에 계모 밑에서 살아가는 아들이 있었다. 계모는 자신이 낳은 2명의 아들에게는 온갖 사랑을 배푸는 대신 의붓아들에게는 끼니를 거르게 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계모 밑에서 마치 짐승처럼 살아가는 아들의 고행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계모와 2명의 아들을 내쫒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고통을 겪으면서 살고 있던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2명의 아들과 계모를 내쫓게 되면 세 명이 눈물을 흘리면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이대로 살아간다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저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국 아들의 간곡한 하소연을 받아들인 아버지는 계모를 곁에 두었다. 그 아들 또한 고통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계모가 큰 감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감동의 정치는 희생과 관용이라는 이랑에서 싹을 틔우는 법이다. 증오와 미움을 이견 낸 슬기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 눈물은 사랑을 길러내는 자양분이 된다. 희생과 관용의 힘의 원천은 ‘내 탓이오’라는 가치관에 있다.

감동의 정치세계를 열어젖히기 위해서는 바다와 같은 아량과 포용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바다는 어떠한 물도 사양하지 않는다. 그래서 해불양수 海不讓水)가 아니던가.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포용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현명한 농부는 과수나무의 가지치기를 할 때 병든 가지를 모두 쳐내지 않는다. 수만 가지 병을 이유로 모든 가지를 쳐내다 보면 과수나무가 말라 죽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병든 가지가 때로는 과수나무의 성장을 돕고, 풍성한 결실을 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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