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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정치신문

기획•경북 김천 정치사/ 무수한 일화 남긴 역..
정치

기획•경북 김천 정치사/ 무수한 일화 남긴 역대 총선

김경홍 기자 입력 2019/02/08 18:04 수정 2019.02.08 06:04

ⓒ 경북정치신문

재선의 여성 국회의원 탄생
비민주화 시대 불구 무소속 대거 배출
백남억▪박정수의 33년 김천 정치
3선의 이철우 지사, 경북도 지사 당선



<제21대 총선을 14개월 남겨놓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전당대회를 통해 총선을 진두지휘할 지도부 구성을 마감하면 바로 총선정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경북정치신문은 질곡의 현대 정치사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로 했다.
정치는 때때로 질타와 외면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향수를 제공하기도 한다. 공동체의 삶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로 경북도 최초 시로 승격한 김천 현대 정치사를 조명한다/ 편집자•주>


1949년 8월 15일 같은 날, 광역시로 분할이 되기 이전 경북도내에서는 처음으로 대구시와 함께 시로 승격된 김천시는 역사와 전통의 도시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김천은 정치와 교육,경제의 꽃잎을 풀어 올렸고, 잉태한 씨알들은 도내는 물론 전국에 문명의 꽃을 피워내게 하는 종자를 제공했다.


1949년 시 승격 당시 금릉군을 포함해 19만명에 육박하던 인구는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21만명을 마크하면서 마의 능선을 뛰어넘었다. 1965년 당시 도내 최대 인구를 자랑하던 26만5천명의 상주군과 자웅을 겨룰 정도였다. 그로부터 54년이 흐른 2019년 현재, 인구 15만명 시대를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 지금의 현실은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김천의 역사와 전통을 가꿔 온 국회의원들

1948년 5월 31일 1대 국회의원 출범을 시작으로 2016년 5월 30일 제20대 국회가 문을 열기까지 68년 세월은 짧지 않은 역사였다. 6.25전쟁, 4.19와 5.16, 10.26사태, 5•18로 이어진 현대 정치는 국민들에게 아픔을 주기도 했지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기도 한 때였다.

이 기간 동안 김천시(금릉군, 상주시/중선거구제)가 배출한 국회의원은 권태희, 이병관, 우문, 여영복, 문종두, 김철안, 김세영, 우동규, 백남억, 김윤하, 박정수, 정휘동, 김상구, 이재옥, 임인배, 이철우,송언석 국회의원 등 17명이다.
하지만 1973년 9대부터 1988년 12대까지는 김천시, 금릉군,상주시를 포괄하는 중선거구제를 통해 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이 당시 상주시 출신으로 당선된 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서인 김상구씨와 김윤하씨 등 3명이었다. 따라서 사실상 김천시가 배출한 국회의원은 14명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최연소, 지역신문 사장 출신
문종두 3대 의원은 37세에 당선됐다. 41세에 당선된 임인배 의원보다도 4년 빠른 나이에 당선된 문의원은 일본중앙대학원을 수료하고 지역언론인 김천시보 사장을 지냈다. 지역언론 사장과 최연소라는 두 개의 타이틀을 거머쥐는 기록을 남겼다.


▷중졸, 여성 국회의원
중졸 출신도 2명이나 됐다. 특히 중졸 여성 출신 국회의원을 배출했다는 점은 당시 시대상황에 비추어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주인공이 바로 김철안 의원이었다. 원내 자유당 부인부장을 맡고 있던 김의원은 47세, 중졸과 여성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재선까지 지냈으니, 남성 상위 풍조의 당시로서는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5.16이후 실시된 제6대 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백남억 국회의원
김천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백남억, 박정수 의원이다. 두 의원 모두 지역구 4선과 전국구 의원등 5선을 지냈다.

지난 2001년 유명을 달리한 백남억 의원은 1960년 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 선출돼 정계에 진출한 후 제3·4공화국 시절인 1963년부터 1979년까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6·7·8·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참의원까지 포함하면 5선인 셈이다. 김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17년 동안 정치활동을 했다.

그 만큼 이력도 화려하다. 1963년 당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은 그는 당시 길재호,·김진만,·김성곤과 함께 이른바 '4인방'의 일원으로 민주공화당 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0년 당 의장서리에 오른 백의원은 1973년 당무위원 겸 총재 상임고문을 지냈다

그러나 민주당 참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공화당에 입당, 6대부터 9대까지 국회의원을 지낸 백의원은 1979년 치러진 10대 선거에서는 46세의 신진 박정수 의원에게 쓴잔을 마셔야 했다.

2명의 정원인 김천, 금릉, 상주 선거구에 출마한 백의원은 당시 3만 5200표를 획득했다. 1위는 박정수 4만 3319표, 2위는 장휘동 4만 2477표, 4위는 김윤하 3만 2126표였다.

▷박 정수 국회의원
10대 총선에서 아메리칸 대학원 출신의 46세 박정수 국회의원은 4선의 백남억의원을 누르고 김천 정치사에 새로운 물코를 텄다. 그러나 4선의원을 지낸 박의원의 정치적 행보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10대와 11대에 걸쳐 연거푸 무소속으로 당선된 박의원은 1985년 실시된 제12대 선거에서는 쓴잔을 마셔야 했다.

2명이 정원인 김천, 금릉, 상주 선거구에 출마한 박 의원은 9만 5657표를 획득한 전두환 대통령의 동서이면서 상주출신인 김상구 의원과 3만 3504표를 획득한 이재옥의원에게 2천여표차로 패했다, 당시 박의원은 3만 718표를 획득했다.

그러나 13대, 14대 총선에서 연거푸 당선되면서 4선출신 지역구 국회의원이라는 이력을 만들어냈다. 이어 15대 국회에서는 국민회의에 입당, 전국구의원에 당선되면서 5선의원이 됐다.

10대와 11대 무소속으로 재선에 당선된 뒤 12대 총선에서 무소속간판을 내걸고 3선에 도전했으나 패배한 박의원은 13대에서는 결국 민정당에 입당해 당선된데 이어 14대에서는 민정당의 전신인 민자당 간판을 내걸고 4선에 성공했다.
이어 박의원은 15대에는 국민회의에 입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는 정치적 굴곡의 길을 갔다. 민주당 참의원으로 출발, 공화당에서 4선을 지내면서 지역구와 전국구를 포함 5선의원을 지낸 백남억 국회의원과 박정수의 의원의 정치사는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연세대 정치학과 3학년이던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타운대를 졸업한데 이어 1965년 부인 이범준과 함께 미국 아메리칸 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유학파 엘리트 박의원의 정치적 고향은 김종필 국무총리보좌관이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정치적 거물인 백남억 후보를 누루면서 이름을 알린 김의원은 1996년, 2002월드컵 유치에 전념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국구 의원직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새정치 국민회의에서 전국구 의원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입당, 부총재를 역임했다.

하지만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1998년 3월 외교 통상부 장관에 임명된 박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 김대중 대통령이 일분문화 개방및 천황의 방한을 원하신다'는 발언과 서울주재 러시아 대사관을 강제추방하는 등의 행보를 통한 정치적 상처를 입으면서 5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결국 정치사의 한페이지를 쓴 백남억 의원은 2001년, 박정수 의원은 2003년 유명을 달리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이지만 권력도 짧은 것이다. 현대 정치사의 굴곡을 헤쳐 온 두 거물 정치인에 대해 김천시민들은 어떤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임인배 국회의원

1963년부터 1996년까지 33년 동안 사실상 백남억, 박정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김천 정치사는 새로운 길을 가야했다. 1996년 4월 실시된 총선은 그만큼 지역의 최대 관심사였다.

상황을 반영하듯 후보군도 춘추전국이었다. 당시 실시된 총선에는 9명의 후보들이 난립했다. 특히 한나라당 후보인 대검찰청 중수부 수사관 출신의 임인배 의원과 서울법대 출신으로서 법무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무소속 정해창 후보의 맞대결은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선거결과 임인배 후보는 3만 4576표를 얻어 2만 9831표를 얻은 정해창 후보를 4천700여차로 누르는 기염을 토했다. 임인배 의원이 당선되자 언론은 ' 수사관 출신이 법무부 장관 출신을 이겼다'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9명이 후보가 난립한 선거에서 모 후보는 296표를 얻어 세상을 씁쓸하게 하기도 했다.

세간의 화제를 뿌리며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등원한 임의원은 3선과 국회 상임위원장에 오르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하지만 임의원은 말 그대로 쉽게 넘기 힘들다는 4선의 고지를 앞두고 낙천하면서 잠시 꿈을 접어야 했다.

앞 길은 굴곡이었다. 2008년 10월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에 취임한 임의원은 3년 임기를 5개월가량 앞두고 6월 1일 이임식을 가졌다. 총선 출마를 위해 조기 사퇴를 했다는 설이 나돌면서 관심을 모았으나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이 재임 기간 중 강원랜드 카지노를 드나든 감사원 감사결과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임의원의 걸움을 무겁게 했다.


▷무소속 출신 대거 진출시켜
상주 선거구를 포함해 배출한 27명의 의원 중 여당 출신은 14명, 야당 2명, 무소속은 무려 11명이었다. 그만큼 김천 정치사의 이면에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요인들이 많이 내재돼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지난 2008년 실시된 총선에서는 3선 시장을 지낸 박팔용 후보가 압승을 거둘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을 뒤엎고, 당선된 한나라당 이철우 의원은 3선을 지내다 2018년 실시한 지방선거에서 경북도지사에 당선되는 영예를 안았다.



▶역대 총선 관전 포인트

▷제1대 총선 (1948년 5월 31일- 1950년 5월 30일)
1948년에 실시된 총선은 김천시 갑구와 을구에서 각각 1명씩 2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김천시 갑구에서는 무소속 권태의 후보, 김천시 을구에서도 역시 무소속 이병관 후보가 당선됐다.


▷제2대 총선 (1950년 5월 31일- 1954년 5월 30일)
6.25전쟁이 발발하던 해였다. 2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대한 국민당 우문 후보는 김천시 일원에서 48.6%를 얻어 당선됐고, 중졸 출신의 무소속 여영복 후보는 금릉군 일원에서 19.2%를 얻어 당선됐다.

▷제3대 총선 (1954년 5월 31일- 1958년 5월30일)
1954년 실시된 총선에서도 2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김천시 일원에서는 무소속 문종두 후보가 당선됐다. 지역언론사인 김천시보 사장 출신의 문 후보는 37세로 역대 당선자 중 최연소였다.

금릉군 일원에서 39.6%를 얻고 당선된 자유당 김철안 후보는 김천정치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기록을 남겼다. 당선 당시 47세인 김후보는 중졸 출신이어서 관심을 더 모았다.


▷제4대 총선 (1958년 5월31일- 1960년 7월 28일)
4.19 혁명으로 임기가 2년이었다.. 3대에서 당선된 무소속 문종두 후보와 자유당 김철안 후보가 또 당선되면서 동시에 2명의 재선 의원이 탄생했다.

▷제5대 총선 ( 1960년 7월 29일- 1961년 5월16일)
5.16 군사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임기를 채 1년도 채우지 못했다. 김천시 일원에서는 무소속 김세영 후보가 46%, 금릉군 일원에서는 우돈규 후보가 24.5%를 얻어 당선됐다.

▷제6대 총선( 1963년 12월17일- 1967년 6월 30일)

김천시와 금릉군 일원에서 1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민주공화당 백남억 후보가 3만 2527표(47.1%)로 당선됐고, 재선을 겨냥했던 국민의당 김세영 후보는 2만 9256표로 2위를 차지했다. 3선을 노리던 재선의 여성 후보 자유당 김철안, 자유민주당 김승환, 민주당 김동영 후보도 선전했지만 쓴잔을 마셔야 했다.
결국 백남억 시대를 연 총선이었다.


▷제7대 총선(1967년 7월1일- 1971년 6월 30일)

김천시, 금릉군 일원에서 1명을 선출한 선거에는 5명의 후보가 출전했다. 민주공화당 백남억 후보는 3만 8244(50.6%)표로 당선됐고, 신민당 이병화 후보가 3만 107표로 2위를 차지했다. 이외에도 자유당 김재곤, 민중당 김승환, 대중당 김동영, 한국 독립당 박용준이 후보로 나섰다.


▷제8대 총선 (1971년 7월1일- 1972년 10월 7일)

김천시, 금릉군 일원에서 1명을 선출했다. 3명의 후보가 나선 가운데 민주공화당 백남억 후보 4만 173표(54%), 신민당 조필호 후보가 2만 4569표를 얻어 2위를 차지했고, 국민당 정정문 후보는 9천 685표를 얻었다.

▷제9대 총선 (1973년 3월 12일- 1979년 3월 11일)

김천시,금릉군,상주군에서 2명을 정원으로 하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했다. 7명의 후보가 나선 가운데 무소속으로 상주 출신인 김윤하 후보가 43만 6980(28.6%), 민주공화당 백남억 후보가 4만 1943표(25.5%)로 1,2위를 차지하면서 당선됐다.

이외에도 신민당 이기한 후보가 2만 4039표를 얻으며 선전했고, 민주통일당 조필호, 무소속 박준무, 무소속 박희동, 무소속 홍성표 후보도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뛰었다.

▷제10대 총선 (1979년 3월12일- 1980년 10월 27일)

전두환 정권의 쿠데타로 임기가 1년 6월에 그쳐야 했다. 김천,금릉, 상주일원에서 2명을 선출했다.
이 선거에서는 6-9대에 걸쳐 4선을 고수해 온 백남억 후보가 박정수 후보에게 패배했다. 결국 백의원이 지역정치를 떠나면서 박정수 의원 시대를 예고했다.상주출신 김윤하 의원 역시 패배해 상주 정치를 탈바꿈시켰다.

7명의 후보가 나섰다. 무소속 박정수 후보가 4만 3319표(24%), 무소속 정휘동 후보가 4만 2477(23.5%)로 1,2위를 차지하면서 당선됐다.
민주공화당 백남억 후보는 3만 5200표 무소속 김윤하 후보 3만 2126표, 신민당 이기한 후보는 1만 5113표를 얻었다. 이외에도 민주통일당 임재영, 무소속 이재옥 후보도 선전했다.


▷제11대 총선 (1981년 4월 11일- 1985년 4월 10일)

김천, 금릉, 상주에서 2명 의원을 배출했다.
7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10대에 이어 무소속으로 출마한 박정수 후보가 4만 9922표(28.2%), 민정당 정휘동 후보가 4만 6093표(26.1%)를 얻으면서 1,2위로 당선됐다. 민주공화당이 사라지고 민정당 시대가 열리는 때였다.
이외에도 민권당 정정문, 민주한국당 한봉수, 무소속 이재옥, 무소속 김종섭, 무소속 김인 후보가 나섰다.

▷제12대 총선 (1985년 4월 31일- 1988년 5월 29일)
김천, 금릉, 상주에서 2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3명의 후보가 나선 선거에서 상주출신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동서인 민정당 김상구 후보가 9만 6567표(49.3%), 3수에 도전한 신한민주당 이재옥 후보가 3만 3504표(17%)를 얻어 1,2위로 당선됐다. 무소속을 고집하면서 3선을 겨냥해온 박정수 후보는 3만 718표를 얻는데 그치면서 쓴잔을 마셔야 했다.
이외에도 국민당 김한선 후보가 2만 3349표를 얻었으며, 민한당 이기한 후보도 선전했다.

▷제13대 총선( 1988년 5월 30일- 1992년 5월 29일)

김천, 금릉에서 1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동일 선거구에서 정원 1명을 유지해 오고 있다.

12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패배한 박정수 의원이 민정당 후보로 나서 5만 4067표( 63.9%)를 얻고 당선됐다. 민주당 박희동, 평민당 정정문, 공화당 조석환 후보도 뛰어들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제14대 총선 (1992년5월 30일- 1996년 5월 29일)
김천, 금릉에서 1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5명의 후보가 나섰다. 민정당에서 이름을 바꾼 민자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수 후보가 4만 3687표(53%)를 얻어 당선됐다.민주당 정정문, 신정당 박휘동, 무소속 문종철 후보도 나섰지만 차후를 기약해야 했다.

▷제15대 (1996년 5월30일- 2000년 5월29일)
6대부터 14대에 이르기까지 33년동안 백남억, 박정수 의원이 주도해온 시대를 종료시킨 선거였다. 그런만큼 김천 선거 역사상 최대 경쟁률을 기록했다. 김천시와 금릉군이 통합된 가운데 치러지는 첫 선거라는 의미까지 부여됐다.
또 법무부 장관 출신의 정해창 후보와 수사관 출신의 임인배 후보가 맞붙어 흥미를 더해 주기까지 했다.
결국 한나라당 임인배 후보가 3만 4576표( 45.2%)를 얻으면서 2만 9831표를 얻는데 그친 정해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외에도 국민회의 공부동, 민주당 박연옥, 자민련 김한선, 국민연합 조석환, 무소속 박영우, 여인섭, 이병무 후보가 가세했으나 쓴잔을 마셔야 했다. 특히 모 후보는 296표를 얻어 역대 김천선거 사상 최소표를 얻은 기록을 남겼다.


▷제16대 총선 ( 2000년 5월 30일- 2004년 5월 29일)
1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3명의 후보가 나섰다. 기상청 홍보관으로 널리 알려진 김동완 후보에게 관심이 쏠리기도 했으나 3위에 머물렀다.
한나라당 임인배 후보가 역대 최대 득표율인 4만 9544표(75.4%)를 얻으며 당선됐고, 민주당 박영우 후보 9천 274표, 자민련 김동완 후보는 6천 925표였다.

▷제17대 총선 (2004년 5월 30일- 2008년 5월 29일)

1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3명의 후보가 나선 선거에서 한나라당 임인배 후보가 4만 1686표(62.2%), 무소속 임호영 후보가 1만 6584표를 얻었다. 열린 우리당 배태호 후보도 선전했다.

▷제18대 총선( 2008년 5월 30일- 2012년 5월 29일)

1명의원을 선출했다. 4선을 겨냥해온 임인배 의원이 낙천하면서 대신 이철우 후보가 한나라당 간판을 내세우고 나섰다. 이 선거 역시 3선 시장 출신의 박팔용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관심을 모았다.

선거중판까지 박 후보가 압승을 거둘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투표함을 열면서 또 다른 이변을 연출했다. 한나라당 이철우 후보는 3만 5933표(53.3%), 무소속 박팔용 후보 2만 9820표였다.

▷제19대 총선(2012년 5월30일-2016년 5월29일)
1명의원을 선출했다. 19대에 이어 한나라당 이철우 의원이 4만9909표(83.45%)를 얻으면서 전국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민주평화당 배영애 후보는 9천884표(16.54%)를 얻는데 그쳤다.

▷제20대 총선(2016년 5월30일-2020년 5월29일)
1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이 4만2340표(64.25%)를 얻으면서 3선에 당선됐다. 무소속 박판수 후보는 2만3549표(35.74%)를 얻었다.

▷2018년 재보궐 선거

이철우 현 도지사가 지방선거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재보궐 선거 요인이 발생했다.
전국 13곳의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당이 12곳에서 승리를 거뒀다. 김천이 유일하게 자유한국당 후보를 당선시키면서 화제를 낳았다.
자유한국당 송언석 의원과 무소속 최대원 후보가 박빙양상으로 전개된 선거에서 송 의원은 493표차로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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