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억대 주식 투자자, 헌법재판관 지명
상대적 박탈감까지, 국민 정서도 읽지 못하나
<데스크 칼럼> 최근 대학시절의 청춘을 아스팔트에서 보낸 친구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서슬퍼런 독재의 칼날에 맞서 싸우던 그는 용기있는 지식인이었다. 동료들이 소위 민주라는 이름이 붙여진 잔디광장에 모여앉아 술잔을 주고받는 그 즐거운 시간에 그 친구는 홀로 독재타도를 외치며 불끈 쥔 손을 허공을 향해 내지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동료들이 ‘슬프고, 힘들고, 억울하고, 분노스럽고... ’하는 명분을 안주삼아 술잔을 들이키고 있을 그 시간에 도서관 앞에서 혼자 민주화를 외치던 그의 외로운 모습은 세월과 함께 부끄러움으로 흘러들었다. 아름다운 젊은이었다.
그런 그가 생계와 생존 경쟁에서 패한 후 우울증을 앓다가 20대 나이에 불끈 쥔 주먹을 휘두르던 그 창공 속으로 날아간 것이다.하지만 그 친구가 저 홀로 민주화를 부르짖는 그 시간에 민주라고 하는 잔디광장에서 술잔을 들이키던 우리들 중의 많은 이들이 세상의 양지에서 호의호식을 하고 있으니, 세상사는 무상하고 고약한 일이다.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많은 이들이 문재인 정부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들은 지금,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복지는 물론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운 이들을 위한 정책 제시에 대해 필자는 없는 힘까지 쏟아부으며 삿대질을 할 필요도 못 느끼지만, 박수를 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모두가 가난한 공동체 속에 섞여 있으면 본인이 가난하다는 현실을 절절하게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풍족하게 살아가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될 때 가난한 현실은 더욱 더 피부에 와 닿는 법이다. 상대적 박탈감, 열등감이 그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35억원대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판사를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국민적 비판을 받고 있다. 수십억원대의 주식보유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리 없는 정부가 국민적 저항이 예상되는 인사를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한 까닭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독재와 투쟁의 이력을 갖고 있는 선민인 내가 지명을 했으니 올바른 판단이고, 그러므로 따라오라’는 얘기인가.
공동체의 가장 무서운 적은 선민의식이다. 특히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태생한 선민의식은 고집을 넘어 아집으로 간다. 병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국민들은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를 놓고 밤잠을 설치고 있다. 오즉해야 국민들이 ‘먹고 사니즘’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냈겠는가.
국민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마당에 수십억대 주식투자자를 헌법재판관으로 지명까지 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상대적 박탈감까지 불어넣어 어쩌자는 셈인가.
혹여, 문재인 정부의 가치 기저에 선민의식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독재와 싸우면서 청춘을 바친 자신의 생각이 옳으니, 잔말 말고 따라오라는 식의 선민의식이 작용하고 있다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80년대 청년들의 민주화 투쟁의 목표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타아적 관점이었다. 하지만 그 투쟁의 목표가 세월을 거듭하면서 퇴색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국민들은 말한다.
“당신들의 민주화 투쟁은 결국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수십억원대의 법관을 헌법재판관으로 지명한 문재인 정부의 인사철학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저 홀로 모아 쥔 손을 허공에 내지르던 그 고독한 청년이 그립다. 그가 바로 남을 위해 살다간 민주투사였다.
<발행인 김경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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