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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정치신문

‘정두언의 자살’,안개의 셋강을 건너는 구미시민들에게..
오피니언

‘정두언의 자살’,안개의 셋강을 건너는 구미시민들에게

경북정치신문 기자 press@mgbpolitics.com 입력 2019/07/17 11:12 수정 2019.07.17 11:12

<데스크 칼럼> 우기가 시작되던 6월 어느 날 모 지인은 축 늘어진 어깨에다 우울한 표정을 한가득 이어매고 가는 필자에게 다가왔다. 햇살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힘내세요. 아직도 청춘인데 세상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우세요, 어짜피 결국은 우리 모두 흙이 될 길을 가고 있는데...그렇다면 육신이 으스러지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으세요”
소소한 웃음을 이슬처럼 뿌리며 사라지는 뒷모습 너머 구미 공단에는 자욱한 안개가 내려앉고 있었다.

1980년대는 생명의 가치가 무시되던 시절이었다. 인간의 가치, 자본의 가치,공동의 운명체적 가치가 합법성을 위장한 폭력 앞에 짓밟히던 그 시절, 많은 젊은이들은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분신했다. 부모들은 땅을 치면서 죽어나간 자식을 끌어안고 통곡 했으나 메아리일 뿐이었다. 그 시절, 소위 시집 오적으로 알려져 있던 시인 김지하는 분신에 대해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라는 칼럼을 모 언론에 게재했다. 약자들,민주지향의 시민들은 다시 또 울어야 했다.

그 무렵 필자는 뒤르켐의 자살론에 잠시 심취돼 있었다. 아미노적, 이타적, 숙명론적 자살이라는 3대유형 중 과연 내가 자살하면 어느 쪽에 속할까하는 사치스러운 고민을 하던 풋내기 문학도였던 시절이었다.

1985년 1월, 그 무렵이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을 읽어내리던 필자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기형도의 당선작 ‘안개’는 충격적이었다. 평론은 이렇게 써 내려갔다
“한 개인의 불행한 삶을 예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세계(그 당시의 한국사회)의 어둠을 환기시키는 우울한 선율을 품고 있다..”
군사 독재시절,소중한 생명들의 가치를 무참하게 짓밟던 상황을 가슴에 써내려 간 그는 4년 후인 1989년 3월 7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마감했다.

최근에는 착하디 착한 구미 A체육인이 자신의 차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16일에는 또 정두언 전 의원이 북한산 자락의 공원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모 종편에 출연해 정치와 국가를 근심하던 그였다.

숲이 갈수록 풍성해지는 것은 부대끼면서 야유를 주고 받기도 하지만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비바람이,눈보라가 몰아쳐도 숲속의 여린 나무들은 살아남는다. 하지만 홀로 서 있는 나무는 제아무리 몸집을 자랑해도 쓰러지기 마련이다.
뒤르켐이 말하는 소위 이타적 자살이 이어지고 있다. 사회의 가치, 자본의 가치가 개인의 가치보다 중시되는 이타적 자살의 풍조를 과연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기형도 시인의 시 ‘안개’ 에는 이런 구절로 이어진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이 세상으로 진입하는 우리의 후손들, 과연 그들은 안개의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서로 손을 맞잡고 밀어주고 끌어주고, 부둥켜 안는 인간 숲이 되어 걷는다면 행복으로 가는 다리가 될 것이다.

자본의 가치가 인간존재의 가치 위에서 군림하고 있다. 정치적 가치 또한 인간의 존엄성 위에서 호령하고 있다. 이 가치를 존중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생을 마감하는 그들을 방조하는 죄인이 될 것이다.

정두언 전 의원이 생을 마감했다는 속보, 구미공단 수출이 전년보다 13%이 줄었다는 뉴스타전을 보면서 시 ‘안개’를 다시 읽었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다시 접한 시는 더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구미공단에 안개가 자욱하다. 그 곳을 향해 걷는 근로자들, 그들로부터 영양을 섭취하는 지역경제 어깨가 늘어져 있다. 만나는 이들 열이면 아홉, 죽고싶다고들 한다.모두들 힘들고 어려운 암흑의 터널을 걸어가고 있다.

함께 가면 터널이 십리지만 혼자가면 백리, 천리가 될 수 있다.
함께 가야 한다는 인간의 길을 버리면 우리들 중 누군가도 이타적 자살의 길을 가지말라는 법이 없다. 수많은 이들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벼랑 끝에서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안개의 강을 우리는 공존공생의 가치 이념을 앞세우고 건너야만 한다. 그래야만 행복의 광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고름이 가득한 상처부위를 치유하는 최고의 약은 통풍이다.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어우러져 서로 등을 다독이고,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넣는 소통문화와 함께 한다면 극단적 선택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적 가치가 인간적 가치, 정치적 가치가 인간적 가치를 위협하는 무서운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정두언 전 의원이나 모 구미체육인의 안타까움은 남의 일이 아니다.
<발행인 김경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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